2018년 그림 커미션이라는 세계를 접한 이래로 그에 대한 관심은 시기에 따라 오르내려 왔습니다. 지난 4월 당시에 유달리 눈에 밟히던 작가분 픽시브 리퀘스트를 제출하려고 고민할 즈음에는 관심 '수위'가 제법 차올랐습니다. 그렇게 찰랑찰랑한 채로 며칠 고민하다 4월 19일 저녁 픽시브 리퀘스트 페이지에 들어가 구체적 내용을 써내려갔습니다.
작가분이 캐나다 출신인 걸 뒤늦게 알아 파파고 번역기와 더불어 작성한 일본어 의뢰서를 파기하고 영어로 처음부터 재작성하는 촌극도 있었습니다. 발송 버튼을 누르는 시점까지도 '51 대 49'여서 거절당해도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상대방이 승인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고 물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떤 주제의 그림을 요청했고 결과물은 어떻게 나왔는지는 몇 문단 뒤로 미루고 픽시브 리퀘스트 시스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먼저 써볼까 합니다. 픽시브는 작가에게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요청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리퀘스트 기능을 톱 페이지 목 좋은 위치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10% 커미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지에서는 경쟁이 치열한지 해당 그림 리퀘스트 시스템을 먼저 정립한 서비스 skeb은 무기한 수수료 무료를 선언하며 후발주자 대비 우위를 점하려는 행보를 보이더군요.
이와 같은 서비스가 의뢰인과 작가 연결을 간편하게 해 주고, 플랫폼 참여로 간편한 결제와 최소한의 자금 보호 기능이 있는 건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뢰서 한 번에 본인의 의도를 모두 담아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더불어 상대방의 오독,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더라도 손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점 또한 불안 요소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한국과 외국의 커미션(리퀘스트) 문화 차이가 있음을 감안해야 하고, 플랫폼 입장에서는 작가를 중요하게 생각해 그 쪽 인원 보호에 방점을 찍으려는 의도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의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예전 예능에서 흔히 나왔던 벌칙용 검은 상자에 손을 집어넣는 기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리퀘스트 수락 후 60일 내 완성품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 또한 양날의 검이더군요. 처음 설명을 읽을 때에는 기간 내 작품을 제공하지 못하면 환불이 보장되니 오히려 구매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 달 정도 기다린 시점에서 역지사지해 생각해 보니, 상대방은 빨리 작업해야 할 인센티브가 없더군요. 빠르게 제공한다고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독촉 메일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60일을 초과하지 않을 정도로 우선순위를 늦추고 그 전까지 다른 일을 하는 게 이익입니다.
경과된 일자보다 남은 일자를 세는 게 더 쉬워지고, 남은 일자를 세어주는 iOS 위젯도 볼 때마다 홧병이 도지는 것 같아 치워버린 접수 54일차인 6월 12일 아침,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알림이 도착했더군요. 60일 기한 반환점을 돌았을 때-시기로는 5월 중후반-에는 "내가 이런 걸 왜 신청해서..." 라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번 달 들어서는 (유명하지만 실험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반박도 있는) '분노의 5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접어들어 60일 마감일 직전 학부생 과제 제출하듯 밀어넣기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며 집착을 놓은 상태였기 때문인지 예상했던 것보다 기쁜 마음으로 완성품을 받아들었습니다.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야외 캠핑에는 체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여가 시간에 운동에 푹 빠져버린 이누야마 아오이, 라는 컨셉입니다.
이제는 전통이 된 ‘받은’ 그림 배경화면으로 쓰기. 세로로 긴 그림이어서 상대적으로 편집이 쉬웠습니다. pic.twitter.com/lJ6HcjUECm
— 나가토 유키 (@nagato708) June 12, 2021
평범한 캐릭터를 '건강한' 모습으로 그린다는 주제의식은 2020년 12월, "케모노 프렌즈" 가방으로도 표현한 바 있지요. 또한 이누야마 아오이 캐릭터를 커미션으로 맡긴 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2020년 8월).
* 픽시브 리퀘스트 접수 수락 메일과 완성 통보.
request 6 #犬山あおい #ゆるキャン△ #腹筋 https://t.co/jElGDa8ibG pic.twitter.com/nJtMgh8jDw
— cromwellb (@cromwellb_) June 11, 2021
이 블로그 글 또한 리퀘스트 초안을 작성하던 시점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마무리 문단을 쓰며 다시 읽어보시 읽어보니 그림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완성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더 길어졌네요. 그림 리퀘스트 서비스에 과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의뢰인 입장에서는 첫 인상보다 일이 복잡해지고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문단을 쓰는 시점에는 커미션 욕구는 썰물 상태이지만, 전례를 보면 언젠가는 밀물이 찾아올 테지요. 다음에는 이번 의뢰의 교훈을 바탕으로 종합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