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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번역의 중요성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불만스런 번역이 있는 것이야 하루이틀 일은 아닙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주로 서브컬처와 관련해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자막에 대해서 언급했지만, 다른 곳에는 불만스러운 번역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갑자기 이런 피상적인 글을 쓰게 된 데에는 최근에 읽은 책 하나가 총체적 난국이어서입니다. 서문과 목차를 넘어 본문 10쪽 읽고 나서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전형적인 문구로 가득한 역자 서문을 다시 읽어보고, 정작 역자의 약력은 실려있지 않은 것만 확인하고는 계속해서 읽어내려갔습니다.

사흘만에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불길한 느낌이 들 때 관두고 차라리 원서를 구해 읽었어야 했다는 겁니다. 마치 영어학원에 가면 강사가 직독직해 식으로 해석해주는 문장을 책에 쭉 찍어놓으니 눈이 둘 곳을 모르고 문장을 오고갑니다. 설상가상으로 교정도 제대로 안 봤습니다. 띄어쓰기도 엉망이고, 고유명사 표기도 제멋대로인데다 자꾸 문장에서 단어 하나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장에는 한 쪽에 하나씩 탈자가 있는데 웃기지도 않더군요. 게다가 마지막 장이 결론 역할을 하는데 그 중요한 부분에서 번역을 생뚱맞게 해 버려서 저자의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습니다. 번역된 문장을 계속 읽다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서 Google Books로 원문을 읽어보니 (다행히도 부분 검색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번역이었더군요. 이건 역자만의 문제도 아닌, 편집자가 해야 할 교열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봐야합니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책을 원서로 접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단지 책을 밀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번역이나 편집에도 신경써 주기를 바랄 밖에요.

여담으로 번역으로 악명 높은 책 중 하나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있죠. 결국 2010년에 원작자가 새 판본을 낸 것도 아닌데 "전면개정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 번역본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2010년판 번역은 접하지 못했지만, 2006년에 나온 30주년 기념판과 페이퍼백 영어본은 갖고 있습니다.

# 2014. 1. 22. 추가

번역 및 번역서와 관련한 대담식의 기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오역 '지적질'로 그칠 것인가? 더 좋은 독서를 원한다! - 2014년 1월 10일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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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적으로 운이 좋아서 한국 마이크로소프트 사장을 지내시고 번역서를 여럿 내시고는 지금은 앤젤 투자를 하시며 업계인들 만나시거나 후학을 가르치시며 노년을 보내시는 분을 알게 됐습니다만, 그분이 개탄하시는 것이 통역에 비해 지나치게 싼 번역 비용이었습니다. 쓴 입맛을 다시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