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상반기 "너의 이름은." 더빙은, 진행 과정에서부터 논란 거리를 쌓았고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여론이 폭발했습니다. 단순히 팬 간의 설왕설래를 넘어 현직 성우가 실명으로 더빙 과정을 비판하고 더빙에 참여한 배우가 직접 입장을 내놔야 할 지경에 이르렀죠.
* 문제의 예고편
그렇게 귀를 씻고 싶은 경험을 한 뒤 더빙에 대해서는 잊고 살았는데, "너의 이름은." 더빙판을 접할 기회가 생겨 시청해 보았습니다. 예고편만 봐도 기대감은 없었지만, 작품을 감명 깊게 본 이로서의 호기심은 남아 있었으니까요. 또한 세간의 부정적 평가도 가장 극단적인 부분만 남아 부풀려진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하는 기대 섞인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프닝이 끝나는 부분 즈음에서 사그라졌습니다. 주연 연기는 예고편에서 짐작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입니다. 양 쪽 모두 감탄사 등 목소리로 감정을 드러내야 할 때에는 국어책 읽기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예고편에서 미츠하가 잠에서 깰 때 "헛" 하는 수준의 연기가 작품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나마 미츠하가 나은 평가를 받은 건 연기 대상과 성별과 나이대가 비슷하기 때문이지, 평범한 대화가 아닌 감정 연기가 필요한 곳에서는 타키 역과 대동소이합니다.
타키 역에 대해서는 예고편 공개 당시에는 "10대 치고 너무 늙은 목소리 아냐?"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는데, 작품 전체에서는 이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작품에서 1인 2역을 연기해야 하는데, 어떤 시간대에 누가 들어가 있어도 한결같이 본인 목소리를 내뿜습니다. 연출자도 포기한 건지, 제작 단계에서는 나름 구별했는데도 이 꼴인 건지는 전문가가 아니여서 답하기 어렵네요.
초반부에서 주연의 연기 실력에 원투펀치를 맞은 후에는 '그래도 주요 배역 이외에는 성우를 채용했으니 나머지 배역은 괜찮겠지'라며 희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본과 연출이 삐걱거립니다. 시청자가 읽는 자막과 듣는 더빙에 다른 접근이 필요한 건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막 대본을 최소한으로 수정해서 욱여넣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대사가 적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컷 길이에 비해 대사가 짧아서 지나치게 늘어지고, 다른 장면에서는 컷보다 대사가 길어 콜렉트콜 제한시간에 맞추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말할 때도 있습니다.
더빙판을 맡은 PD가 애니메이션 더빙은 처음이라는 부분을 비판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데 (다만 보도에 따르면 실사 영화 배리어프리 더빙은 한 번 했습니다) 그런 부분이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느끼셨겠지만 어느 한 장면을 꼽을 수 없을만큼 총체적 난국입니다. 특히 카타와레도키 장면에서는 작품의 모든 문제 - 연기력, 대본, 연출 - 가 잘 버무려져 있는데,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임에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비교하기도 민망하지만 애니플러스의 "케모노 프렌즈" 더빙과 비교해보면 대체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각 작품의 책임자인 애니플러스와 미디어캐슬은 더빙에 애착이 있는 이에게는 조금은 껄끄러운 집단입니다. 하지만 애니플러스는 더빙판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잡을 때 경력이 있는 PD를 기용하여 양질의 성우진과 연출을 확보했고, 선행상영회와 티저 영상으로 홍보도 함께 했습니다.
반면 미디어캐슬은 오디션을 한다는 등의 공수표만 남발하다 결국은 더빙 팬의 역린인 주역에 연예인 캐스팅을 넣었습니다. 거기에 경험이 부족한 실무진을 섭외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게다가 해당 PD는 트위터에서 부당하게 비난받는다는 뉘앙스의 발언까지 해 논란에 기름을 끼얹기까지 했죠.
엔딩롤이 올라올 때, 예전 지상파 예능 중에 정극 대본을 주고 n번 내에 성공하는 게 목표인 프로그램이 떠올랐습니다. TV 프로그램 과제라면야 웃고 지나갈 수 있지만 정식으로 영화관에 걸리는 작품을 그런 수준의 더빙과 비교해야 한다는 건 한 명의 시청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글의 시작을 충격적인 "너의 이름은." 더빙으로 열었으니, "케모노 프렌즈" 더빙 오프닝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좋은 더빙이니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