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어느 집에나 있음직한, 한 번 들어가면 꺼내는 일이 없는 창고에 가까운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그 중에 2000년대 초반에 그렸을 개인 홈페이지 레이아웃 구상을 해 놓은 종이를 찾아냈습니다. 지금 보면 상상력이라고는 없는 전형적인 설계지만 과거의 저는 종이 한 면 가득, 여러 색의 펜을 써 가며 꼼꼼하게 사이트맵을 그렸더군요.
2000년대 초반 웹 이야기에서 제로보드를 빼놓을 수 없죠. 개인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제법 규모가 되는 사이트에서도 다들 제로보드를 썼죠. 제가 발굴했던 사이트맵도 껍데기만 html이고 공지사항부터 사진첩까지 모두 제로보드 게시판이 붙는 구상이었습니다.
당시 유명했던 사이트를 따라하면서 메뉴바를 옮기거나 게시판 스킨을 바꾸는데 푹 빠져 정작 내용물은 사이트 새로 만들 때마다 다 리셋했죠. 요즘 싸이월드가 리뉴얼하면면서 2000년대 중반의 과거사를 돌이키며 속칭 "이불킥"을 하시는 분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날려버린 게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만들었던 수많은 HTML 파일은 몇 번의 컴퓨터 교체 과정에서 유실되었습니다. 옛날에 만들었던 기억이 있는 백업 CD도 몇 년 전에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실패했고요. 설사 찾았더라도 지금까지 잘 읽혔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로보드를 만지작거렸던 시절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터넷은 많이 변했습니다. 2009년에 시작한 이 블로그도 올해로 6년차인데, 15년 전과 다름 없이 들어오는 사람은 없지만 이런저런 부분을 바꾸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스킨을 좀 수정해서 중구난방이던 색깔 톤을 맞추고, 출력 부분 디자인도 좀 다듬었습니다.
지난 6월에 당시 다음카카오가 글쓰기 플랫폼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글을 짧게 썼는데, 그 사이 "다음"이라는 이름이 사명에서 사라져 카카오가 되었지만 티스토리 자체는 관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얼마 전에는 웹 트렌드에 맞는 반응형 디자인 스킨도 제공하기 시작했고요.
물론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가 없기 때문에 어느 날 홈페이지에 로그인하면 서비스 종료 공지가 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만약 티스토리를 떠나야 한다면 호스팅을 받아 Wordpress를 깔거나 한국어 문제가 해결된다면 Squarespace 등의 유료 매체로 옮겨가야 하겠죠. 하지만 이미 도메인 비용만으로도 충분히 잉여 비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서비스 종료나 그에 준하는 치명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계속 여기 있어야겠죠.
그만큼 오랫동안 인터넷에서 혼자 말하고 돌아다녔으면 거기에 익숙해질만도 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보통 때는 그냥 내 자신이 백로그로 쓰기 위해 인터넷에 기록해 놓는 거라고 생각하며 넘기지만, 가끔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나무가 쓰러진다면 그 나무는 쓰러진 것인가"류의 회의가 들기도 하죠. 서랍에서 발견한 종이가 발화점이 된 모양인지 결국 이런 두서없는 글까지 쓰게 되었네요.
p.s. 이런 넋두리가 처음은 아닙니다. 2014년 초에도 블로그의 방향성에 대한 글을 쓴 바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