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지직에서 9월 24일부터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이보기가 열렸는데, 추석 연휴 기간에 시작해서 남는 시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궁금해져 겸사겸사 구경하다 보니 사실상 정주행을 해 버리고 함께 가져오지 않은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도 다시 봤습니다(다행히도 넷플릭스를 포함한 주요 OTT에 올라와 있어)
1990년대 말 실시간 방영본을 현지에서 복제해 직수입한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본 세대는 아니지만 2003년 디지털 리마스터를 거친 첫 리뉴얼판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 처음 본 작품이어서 이제는 러프하게만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이번 기회에 다시 시청하니 기억보다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괜찮은 부분도 있고, 흐려진 기억과 2차 창작 등으로 남아 있던 기억보다 원판은 오히려 별로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작품 내용 자체보다는 당시에 봤을 때는 몰랐던 부분에 눈이 가더군요. 25, 26화의 '슬라이드 쇼' 이전에도 연출로서 기능하지만 덤으로 예산 절약도 생각한 장면들이 말이죠. 사족으로, 현재 미디어로 볼 수 있는 21~24화는 TV 방영 이후 작품이 인기를 얻자 장면을 가필해 품질이 그나마 올라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이 으레 그렇듯) 여러 번 발매된 미디어 세트 중에서는 TV 오리지널 방영판과 수정판을 함께 수록한 세트도 있지요.
의외로 지금 에반게리온 TVA를 다시 보는 데 가장 큰 장벽은 아날로그 셀식 작화도, 지난 30년간 너무나 많은 재패니메이션에도 차용하고 비틀어서 사용하는 바람에 낡아 보이는 연출이나 표현법도, 작품에 얽힌 '분석'과 논쟁도 아닌 KBS 예능 "1박 2일" 효과음으로 쓰여 에반게리온은커녕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알게 된 OST인 'The Beast'입니다.
분명 장면은 진지한데 같이보기에 올라오는 채팅처럼 다음 컷에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예능 자막이 들어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비틀즈의 "Hey Jude"보다 EoE 삽입곡 "Komm, süsser Tod"를 먼저 들어서 전자를 들어도 전 세계의 사람이 환타 색 LCL로 환원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생각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 "에반게리온" 26화 마지막을 장식한 '오메데토(축하해)' 장면과 이를 패러디한 은혼 150화. 참고로 성우 타치키 후미히코는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는 겐도, 은혼에서는 하세가와(마다오)를 맡았습니다.
작품의 주제의식 같은 경우는, 오히려 지난 30년간 시리즈에 덕지덕지 붙은 '꿈보다 해몽'인 부분을 덜어내면 세간의 평가보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편이었습니다. 치지직 같이보기로 사전 정보 없이 보는 스트리머가 애니메이션 먼저 본 게 벼슬인 양 아는 척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깔끔하게 작품을 이해하는 걸 보고 느낀 부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에반게리온 시리즈 중 한국 등급심사에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만 유일하게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TV 애니메이션은 15세, 신극장판 서/파 12세, Q/신 에반게리온 15세). 등급 표시를 보고 당연히 초반의 신지 병원 장면이나 중간 야릇한 실사 컷 때문이겠지 생각했는데, 실제 영등위 평가를 읽어 보면 다른 부분을 지적하더군요.
극한의 정신적 고통을 다루고 있는 주제를 비롯하여, 거대 전투병기와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전투 장면에서 칼로 적의 사지를 자르고, 파괴하는 장면, 피를 연상시키는 액체의 분출, 팔이 잘리고, 머리가 터지는 등 신체훼손에 대한 묘사 등에서 폭력성 및 공포의 수위가 높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표현된 청소년관람불가
예전에 본 장면이라 인이 박혀서 그렇지 2호기 대 양산형 에바 전투는 꽤 잔인하니 말이죠. 저도 고어 내성은 없는 쪽이라 그 정도 연출을 실사 작품으로 보라고 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토할 자신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TV판을 다시 보고 나니 이전에도 마음속에서 별로 높지 않았던 신극장판 4부작에 대한 평가가 더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구작의 경우 예산이 없어 막판에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등장 캐릭터 정신과 상담 내용을 듣는 형태로 '붕괴'하는 와중에도 전달하고 싶었던 내용은 딱 잡혀 있었단 말이죠. 하지만 신극장판은 큰 틀에서는 구작을 따라갔던 서, 파 이후 Q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4편)의 경우 계속해서 표류하다 '옛다' 하고 던져버렸다는 인상. 안노 감독의 제작 방식이 '큰 그림'을 그리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제작하는 건 유명한 이야기이고, Q나 4편 제작 시기의 공식 비하인드 영상에서도 핵심 스태프가 뭘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보여줬으니 말이죠.
4편 개봉 이후 어디선가 주워들은 비평처럼 구작을 마무리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년)과 신극장판 "서"(2007년)의 간격[10년]보다 신극장판 첫 작품과 마지막(2021년) 사이 간격[14년]이 더 넓다는 것은 일반인의 시선에서도 정상적인 제작 과정에 돌아간다고 보기는 쉽지 않아. (당연히 1 대 1로 비교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반게리온 신극장판과 비슷한 시기인 2008년에 시작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인피니티 사가는 영화 23편을 만들고 2019년에 마무리되기도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