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 엄혹한 감염병 시기를 지나 엔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눌려 있던 서브컬처 (2차) 창작이 스프링처럼 폭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적으로 작년에 새 만화/애니메이션 동인 행사 '일러스타 페스'가 론칭된 것만 보아도 그렇지요. 물론 역사적으로 코믹월드 대안이라는 기치를 들고 열린 오프라인 행사가 오래 살아남지 못했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행사 두 개가 몇 달 단위로 돌아도 사람을 채울 정도의 창작자/소비자가 있다는 방증이니까요.
누군가 덕후는 스테레오타입처럼 혼자서만 즐기거나, '인싸' 들도 놀랄 정도로 외향적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평가를 하던데, 제 덕후 취향은 전자입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하면 예전부터 딱히 오프라인 행사에 참여하는 편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 성향의 사람에게 있어 동인 물품조차 개인 간 거래 장벽을 낮춰 주는 플랫폼이 예전에 비해 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요. 물론 동인 행사의 의도와는 멀어지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고 어느 정도는 공감합니다만, 작가 입장에서도 재고를 무한히 안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고 팬 입장에서도 여러 이유로 현장에 방문하지 못했을 떄의 한을 풀 수 있으니 마냥 배척할만한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그래서 올해 중계 플랫폼을 통해 구입한 이런저런 물품 이야기입니다.
우선 작년 12월 서코 통판으로 풀려 1월에 도착한 상품입니다(왼쪽 두 개는 마메챠님, 오른쪽은 aLFie님 일러스트). 기간 차이를 두고 두 곳에서 주문했지만 같은 날에 도착했던 게 기억나네요.
아크릴에 인쇄한 스탠딩 일러스트를 서브컬처에 굿즈로 팔기 시작한 서브컬처계 지옥 상석을 주어야 한다는 커뮤니티 반응에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의도에서 한 발언인지는 알겠지만 적어도 공식 라이센스품과 달리 동인 업계만 봤을 때에는 이것보다 훨씬 실용성은 없이 '작가/작품에 대한 덕심'으로 판매하는 제품도 적지 않으니까요.
아크릴 일러스트를 인쇄하는 데에 딱 정해진 크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극단적으로 크기 차이가 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오른쪽의 작은 칸나 일러스트는 얼추 넨도로이드 크기 정도이고, 왼쪽의 큰 칸나 일러스트는 (일단 머그컵보다 크고) 서 있는 figma 스케일 피겨 높이에 가깝습니다.
머그의 경우 용도에 맞게 커피 마시는 데에 사용하는데, 별 생각 없이 식기세척기에 몇 번 넣었더니 인쇄가 크로마토그래피처럼 번지는 바람에 요즘은 손세척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2월 일페 통판으로 주문받아, 이번 달 중순에 받은 히나타 아크릴 일러스트 한 개(작가는 Wakum). 사실 상술한 '아크릴 회의론' 때문에 이번 사이클에서는 구입할 생각이 크게 없었는데 그래도 대충 어떤 것들이 나오는지는 알아야지 하면서 대행 플랫폼 인기글을 스크롤하다 어느 새 카드 결제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당연히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여서 구입했지만, 통상적으로 아크릴 스탠드는 3D 피겨 '하위 호환' 느낌으로 연출하는데-아예 본격적으로 배경 파츠를 떼어서 디오라마처럼 구성하는 상품도 본 적이 있네요-이 쪽은 '어차피 그림을 인쇄하는 거라면 배경까지 같이 있어도 되지 않나?'라는 정면돌파를 한 게 특이한 것도 구매 결정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그림이 인쇄된 아크릴 대비 받침대가 앙상해 의도치 않게 접합부가 박살나기 딱 좋아 보이는게 문제인데, 만약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면 말 그대로 엽서처럼 벽에 붙여버려도 나쁘지 않을 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