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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블랙홀(1993), 그리고 엔들리스 에이트

category 잡설

시간 반복을 주제로 한 작품을 열거하면 빠지지 않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1993)을 드디어 봤습니다. 어떤 작품은 '명성에 비해서는 좀...'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명불허전이네요. 혼자 시간 반복에 갇혀 변화하는 심리를 보여야 하는 전개로 인해 주연 배우의 역할이 중요한데, 뉴스캐스터 역을 맡은 빌 머리는 그런 중책을 잘 소화했습니다. 굳이 언급한다면 결말이 조금 싱겁다는 생각을 했지만 로맨틱 코미디임을 감안하면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고, 작품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 할 수도 없겠죠.

참고로 원제 "Groundhog Day"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하루로서 미국에서 매년 2월 2일 우드척(Groundhog)에게 날씨가 계속 추울지를 묻는 전통 행사를 이르는데, 그대로 번역해도 제목이 아무런 정보도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현지화 개명한 것이겠죠(예를 들어 일본은 "사랑의 데자뷔"). 다만 '블랙홀'은 어떤 과정으로 제목에 붙은 건지 모르겠네요.

명작의 반열의 오른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한 번 꼭 보시라"라고 권하는 것 이상으로 덧붙일 말은 없지만, 트윗 하나로 끝내지 않고 글을 쓰게 된 건 작품 마지막 크레딧을 보며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엔들리스 에이트는 왜 그런 식이었나?"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저는 엔들리스 에이트 자체를 덮어놓고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2009년 하루히 TV 애니메이션은 "엔들리스 에이트" 등으로 인해 낮은 평가를 받는 데에도 동의합니다. 마침 다른 프랜차이즈의 특정 사건과 얽혀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기도 해서 생각이 그 쪽으로 미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가상의 벽에 던지다 보니 원작 소설부터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폭주"(5권) 단편 '엔드리스 에이트'는 제목이나 이후 TVA로 인한 인상과 달리 시간 반복이라는 요소가 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우와, 우리가 반복 속에 갇혀 있어!"라고 놀라는 장면 외에는 흔하디 흔한 여름방학 소재죠. 굳이 해석하자면 - 출판은 먼저 됐지만 작중 시간대에서는 이전인 - 소실의 복선이라고 볼만한 구절은 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진기하게도 나가토는 없었다. 얼굴에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녀석도 역시 지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 타니가와 나가루 지음. 이덕주 옮김. "스즈미야 하루히의 폭주"(서울: 대원씨아이, 2006) 85.

그렇기 때문에 시간 반복이라는 측면에서만 평하면 TV 애니메이션이 원작에 비해 훨씬 (어쩌면 지나치게) 충실합니다. 다만 상술했듯 레퍼런스가 되어야 할 원작에는 루프물 요소가 적기에 애니메이션 제작진은 부족한 틀 안에서 같은 주제로 8화 분량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셈이었죠. 최종적으로 1화는 자각하지 못함, 2~7화는 사실상 같은 전개로 세목 변형, 8화에서는 원작을 따라 루프 탈출이라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8화짜리 반복을 어떤 이유에서건 만들겠다는 계획을 이왕에 세웠다면 중간 전개는 좀 더 자유롭게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은 듭니다.

루프물에서 많이 나오는 요소로 "결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됨"이 있죠. 실제 예로 "사랑의 블랙홀"에서는 음주운전을 하며 공공기물을 부순 끝에 GTA 처럼 경찰을 달고 다니는 장면이 있고, 드라마 "스타게이트 SG-1"에서도 비슷한 접근법을 썼죠.

일각의 소문처럼 제작위원회 내부에서 억지로 떠맡아 일종의 수동적 공격성(passive-aggressive) 행동으로 최대한 원작을 그대로 따른 건지도 모르죠. 레퍼런스가 있기 때문에 설사 제작진이 문제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적었을지도 모릅니다. 순전히 추측이지만, 뱅크샷도 거의 없이 제작했고 위에서 언급한 얄팍한 "소실" 복선마저도 보강하는 등의 정황 증거를 보면 제작진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운신할 공간이 너무 적어 그런 노력이 전체적인 작품 평가를 올릴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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